온양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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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온양 정씨는 고려 초 호부상서를 지낸 정보천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43명, 우의정 2명, 공신 1명을 배출했으며, 정순붕, 정만석 등이 주요 인물이다. 12세손을 기준으로 삼등공파, 부사공파, 소윤공파로 나뉘며, 여러 분파가 존재한다. 1985년에는 24,134명, 2015년에는 29,761명으로 조사되었다. 조선 시대 상신 2명, 문과 급제자 43명을 배출하여 동래 정씨, 연일 정씨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정씨 본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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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 정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성씨 | 온양 정씨 溫陽鄭氏 |
| 관향 |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
| 시조 | 정보천(鄭普天) |
| 집성촌 | |
| 인물 | |
| 통계 | |
| 년도 | 2015 |
| 인구 | 29,761명 |
2. 역사
온양 정씨는 고려 초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가문을 이어왔다. 시조 정보천은 고려 초 호부상서를 지냈고,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하며 우의정을 역임하는 등 가문을 빛냈다. 특히, 10세 정희, 11세 정진, 12세 정득진은 조선 건국 후에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두문절사(杜門節死)하였다.
2. 1. 시조 및 초기 역사
온양 정씨(溫陽鄭氏)의 시조 정보천(鄭普天, 900년생)은 고려 초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책록되었다고 한다. 정보천은 사로(斯盧) 진지부촌장(珍支部村長) 지백호의 34세손이고, 아버지는 정사맹, 어머니는 면천 복씨, 외조부는 복지겸이다.[1]10세 정희, 11세 정진, 12세 정득진은 조선 건국 후 벼슬을 거부하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두문절사(杜門節死)하였다.
2. 2. 조선시대
12세손 정득량(鄭得良)의 손자 정충기(鄭忠基)가 1450년(세종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1] 정충기의 손자인 정순붕(鄭順朋)은 1504년(연산군 10)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에 이르렀고,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에 봉해졌다.온양 정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43명, 우의정 2명(정순붕, 정만석)과 공신 1명을 배출하였다. 정유(지중추부사), 정예남(영중추부사), 정뇌경, 정광진(대사헌), 정기안(지중추부사), 정유악(형조판서), 정민시(이조판서), 정광한(예조판서), 정창순(예조판서), 정태호(이조판서) 등 10명이 정2품에 올랐고, 정뇌경(충정), 정기안(효헌), 정민시(충헌), 정만석(숙헌) 등 4명이 시호를 받았다.
3. 분파
온양 정씨는 12세손을 기준으로 크게 세 파로 나뉜다.
- 정득진(鄭得珍)의 후손은 삼등공파(三登公派)이다.
- 정득전(鄭得全)의 후손은 부사공파(府使公派)이다.
- 정득량(鄭得良)의 후손은 소윤공파(少尹公派)이며, 여기서 다시 여러 분파가 갈라져 나왔다.
- 정포(鄭誧)의 후손은 고성공파(高城公派)이다.
- 정충근(鄭忠謹)의 후손은 정랑공파(正郎公派)이다.
- 정예종(鄭禮宗)의 후손은 수사공파(水使公派)이다.
- 정인조(鄭仁祚)의 후손은 금위공파(禁衛公派)이다.
- 정순조(鄭順祚)의 후손은 통정공파(通政公派)이다.
- 정충본(鄭忠本)의 후손은 사직공파(司直公派)이다.
- 정충기(鄭忠基)의 후손은 지평공파(持平公派)이다.
- 정수붕(鄭壽鵬)의 후손은 계향당공파(桂香堂公派)이다.
- 정백붕(鄭百鵬)의 후손은 총계당공파(叢桂堂公派)이다.
- 정순붕의 후손
- 정렴의 후손은 북창공파(北窓公派)이다.
- 정적(鄭頔)의 후손은 금송당공파(琴松堂公派)이다.
- 정담(鄭紞)의 후손은 십죽헌공파(十竹軒公派)이다.
- 정구붕(鄭龜鵬)의 후손은 첨정공파(僉正公派)이다.
- 정충간(鄭忠幹)의 후손은 교리공파(校理公派)이다.
- 정대(鄭大)의 후손은 판관공파(判官公派)이다.
- 정주(鄭州)의 후손은 전력공파(展力公派)이다.
- 정유(鄭瑜)의 후손은 온계군공파(溫溪君公派)이다.
- 정희번(鄭希蕃)의 후손은 온성군공파(溫城君公派)이다.
- 정희(鄭熙)의 후손은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이다.
4. 주요 인물
온양 정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시조 정보천은 고려 초 호부상서를 지냈고, 후손들은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43명, 우의정 2명(정순붕, 정만석), 공신 1명을 배출하는 등 가문을 빛냈다.
10세 정희, 11세 정진, 12세 정득진은 조선의 벼슬을 거부하고 고려에 충절을 지킨 두문절사였다.[1]
| 시대 | 이름 | 생몰년 | 주요 경력 |
|---|---|---|---|
| 고려 | 정작진 | ? | 찬성사 |
| 고려 | 정작정 | ? | 찬성사 |
| 고려 | 정존구 | ? | 헌납공 |
| 고려 | 정자준 | ? | 간의대부 |
| 고려 | 정기산 | ? | 찬성사 |
| 고려 | 정달존 | ? | 괴관 찬성사 |
| 고려 | 정응인 | ? | 등제 |
| 고려 | 정응휴 | ? | 감찰어사 |
| 고려 | 정규 | ? | 태의원 승동정 |
| 고려 | 정요 | ? | 영해백 겸 도순문사 |
| 고려 | 정년 | ? | 정산감무 |
| 고려 | 정진 | ? | 보문각 학사, 두문절사 |
| 고려 | 정순우 | ? | 군기소윤, 좌우위보승랑장 |
- 정요의 아들은 (1)년 (2)희(중랑장, 대사성, 두문절사)이다.
- 정년의 아들은 (1)순우 (2)복항 (3)을명(중랑장)이다.
- 정순우의 아들은 (1)득진(삼등현령, 보문각 학사, 두문절사) (2)득전(순흥부사) (3)득량이다.
4. 1. 고려
정득량(鄭得良, ? ~ 1412년)은 고려에서 중랑장(中郞將)[1]을 지냈고, 조선에서는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錄大夫) 벼슬을 지냈다. 아들로는 면(冕), 포(袍), 대(帶) 3형제가 있었다.4. 2. 조선
- 정수붕(鄭壽朋, 1474년 ~ 1534년): 1494년(성종 24) 사마시에 급제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지냈다.[1]
- 정백붕(鄭百朋, 1478년 ~ ): 정수붕의 동생. 1504년(연산군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헌대부 형조판서에 이르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1]
- 정순붕(鄭順朋, 1484년 ~ 1548년): 연산군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工曹)·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거쳐 중종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을 때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소윤(小尹)으로서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활약했다. 그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이 되고 우찬성겸지경연사(右贊成兼知經筵事)에 승진하여 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이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1]
- 정귀붕(鄭龜朋): 152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金化현령을 역임하고, 중직대부(中直大夫)에 올랐다.[1]
- 정렴(鄭磏, 1506년 ~ 1549년): 정순붕의 아들.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유의로서 1544년 중종의 병환에 약을 짓기 위하여 내의원제조들의 추천을 받아 입진(入診)하였다. 처방을 모아 『정북창방(鄭北窓方)』을 편찬하였다.[1]
- 정현(鄭礥): 1545년 을사사화 때 윤임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올라 사섬사직장(司贍寺直長)이 되었으며 1551년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가 되고 다음해 대호군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이르렀다.[1]
- 정창순(鄭昌順): 1757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정조 때 대사간, 대사헌(大司憲),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1]
- 정예남(鄭禮南): 1596년(선조 29)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 어의(御醫)로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의학에 밝아 허준 등과 의방신서(醫方新書)의 편찬에 착수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하였다. 육가잡영에 그의 시(詩)가 전한다.[1]
- 정뇌경(鄭雷卿, 1608년 ~ 1639년): 정순붕의 현손.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좌랑, 수찬, 지평, 정언 등의 언관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를 배종하여 심양(瀋陽)에 갔다가 참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사후 의정부(議政府)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1]
- 정유악(鄭維岳, 1632년 ~ ?): 정뇌경의 아들. 1666년(현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하여 좌승지(左承旨), 공조참판(工曹參判),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고,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 남인(南人)으로서 극변에 안치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등용되었고, 이듬해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獄事)로 다시 진도(珍島)에 안치되었다가 1697년 전리에 방귀, 1699년 방송(放送)되었다.[1]
- 정광한(鄭光漢, 1720년 ~ 1780년): 175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정조(正祖)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1]
- 정기안(鄭基安, 1695년 ~ 1767년): 정순붕의 6대손. 1728년(영조 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66년(영조 42) 한성부 우윤·지중추부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저서로 1834년(순조 34) 아들 정만석이 편집·간행한 『만모유고(晩慕遺稿)』가 있다.[1]
- 정창순(鄭昌順, 1727년 ~ ?):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 관찰사(觀察使),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1]
- 정민시(鄭民始, 1745년 ~ 1800년): 정순붕의 후손이자 창사(昌師)의 아들.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사성 등을 지내고, 예조·호조·이조·형조·공조·병조의 판서와 의정부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정조(正祖)의 총신이며 시파(時派)의 거두였으므로 1801년(순조 1) 벽파(僻派)인 정순왕후(貞純王后)에 의해 관작이 추탈(追奪)되었으나 아들 성우(性愚)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獻).[1]
- 정만석(鄭晩錫, 1758년 ~ 1834년): 정기안의 아들. 1783년(정조 7) 문과에 급제하고, 1829년 우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숙헌(肅獻).[1]
- 정태호(鄭泰好, 1837년 ~ ?): 1858년(철종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1890년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1]
4. 3. 현대
- 정술교(鄭述敎, 1845년 ~ 1915년) : 고종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했다.[2]
- 정상희(鄭商熙, 1907년 ~ 1981년) : 정보천 호부상서(戶部尙書)의 직계손. 이병철의 사돈이다.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삼성전자 초대 대표이사장을 지냈고, 군사정부에서 제4·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일본 황실로부터 서옥대수장(書屋大綬章)을 받았다.
- 정재은(鄭在恩) : 정상희의 차남.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범삼성가로 불리는 재벌가의 일원으로, 신세계 명예회장을 지냈다.
- 정용진(鄭溶鎭) : 정재은의 장남. 미국 브라운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범삼성가의 일원으로, 신세계 회장이다.
5. 집성촌
6. 항렬자
시조를 1세로 하여 29세부터 43세까지의 항렬자가 정해져 있다. 항렬자는 다음과 같다.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
| 口영(永) | 낙(樂) | 口희(熙) | 재(在) | 口진(鎭) | 해(海) | 口식(植) | 형(熒) | 口균(均) | 종(鍾) | 口순(淳) | 동(東) | 口섭(燮) | 기(基) | 口현(鉉) |
7. 인구
| 연도 | 가구 | 인구 |
|---|---|---|
| 1985년 | 5,689가구 | 24,134명 |
| 2000년 | 7,599가구 | 24,897명 |
| 2015년 | 29,761명 | |
8. 다른 정씨 본관과의 비교
조선시대 온양 정씨는 상신 2명, 문과 급제자 43명을 배출하였다. 이는 동래 정씨(상신 17명, 문과 급제자 198명), 연일 정씨(상신 5명, 문과 급제자 119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치이다.
| 순위 | 본관 | 상신 | 대제학 | 문과 급제자 |
|---|---|---|---|---|
| 1 | 동래 정씨 | 17명 | 2명 | 198명 |
| 2 | 연일 정씨 | 5명 | 3명 | 119명 |
| 3 | 온양 정씨 | 2명 | 0명 | 43명 |
| 4 | 청주 정씨 | 2명 | 0명 | 20명 |
| 5 | 봉화 정씨 | 2명 | 0명 | 8명 |
| 6 | 진주 정씨 | 1명 | 1명 | 59명 |
| 7 | 하동 정씨 | 1명 | 1명 | 65명 |
| 8 | 초계 정씨 | 0명 | 0명 | 60명 |
참조
[1]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정충기
[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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